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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보는 서양미술사

[바로크 미술] 얀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하녀'

[바로크 미술] 얀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하녀'

 

얀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하녀>, 1657~58, 캔버스에 유채, 45.5X41cm,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네덜란드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는 누가 국가를 준다 해도 바꾸지 않겠다고 할 만큼 네덜란드 국민이 사랑하는 화가입니다.

대부분 실내를 소재로 한 40여 점의 소품과 2점의 풍경화만이 확인될 뿐 그다지 많은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아닌데도 말이에요. 아버지도 화가였다 하나 그에게서 그림 수업을 받았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바깥에서 화면을 지그시 들여다보고 있는 화가가 먼저 떠오릅니다.

빛알갱이 하나, 먼지 하나에까지 주의를 기울이며 동태를 살피는 화가의 따뜻한 눈길이 그대로 느껴지지요. 그래서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화가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물체 스스로가 서서히 제 빛깔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장식이 없는 부엌 모퉁이에서 노란색 웃옷과 붉은색 스커트에 청색 앞치마를 두른 젊은 하녀가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나 봅니다. 식탁 위에는 빵이 담긴 바구니 도기 물병, 냄비, 늘어놓은 빵조각, 푸른색 행주가 놓여있고, 테라코타 주전자에서 하얗게 흘러내리는 우유만이 이 고요한 부엌의 정적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빛은 벽에 걸려 있는 빵이 담긴 바구니와 놋쇠 주전자를 비추고 있고, 바닥에는 작은 발난로가 놓여 있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도 그렇지만 '우유를 따르는 하녀'는 특히 색의 매력이 돋보이는 그림입니다.

베르메르는 빛을 받고 있는 사물의 표면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전체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노랑은 노랑대로 파랑은 파란대로 그 색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자리에 정확히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 여자는 어둠 안에 가만히 형태를 숨기고 있는 것들과 대비를 이루며 마치 색깔을 만들어 내듯 우유를 따르고 있네요.

물체에 가 닿는 빛은 물체의 존재를 확인시키고는 혼자 번뜩이지 않고 부드럽게 한 걸음 물러나 전체를 감쌉니다. 참 다행이지요. 그래서 소박한 실내 소품과 하녀를 소재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매우 고상한 품위를 지니게 되었으니까요.

 

베르메르는 너무 가난해서 처가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중산층 집에서는 하녀는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중요한 존재였는데, 화려한 음식은 아니지만 정성을 다해 식탁을 차리는 성실한 하녀의 모습이 신중한 화가의 시선에 잡혔네요.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 역시 그림을 더욱 탄탄하게 합니다.

아무리 표현이 뛰어나다고 해도 균형이 맞지 않고 배치가 어색하다면 감상하는 사람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겠지요. 또한 윤곽선을 부드럽게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체들은 흐트러짐 없이 단단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론가의 말대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 베르메르의 그림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가장 적합한 표현 같습니다.

 

미술관에서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고 있던 어느 관람객은 그의 그림 앞에서는 숨조차 함부로 쉬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자녀가 11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 많은 아이들의 엄청난 소란 속에서 어떻게 이런 고요하고 정돈된 그림이 그려졌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입니다.

소재나 방법 등이 당시로서는 꽤 실험적이어서 생전에는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특별히 영향을 끼친 스승이 없듯이 빈틈없는 그의 그림 구조를 흉내 낼 수 있는 후배 화가도 없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 회화는 17~18세기가 황금기였습니다.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종교의 역할이 미약했던 네덜란드에서는 일찍이 무역이 발달했고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신흥 부자가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귀족과 종교의 부속물처럼 여겨지던 예술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어렵고 고루한 종교화를 피해 자신들의 일상을 소재로 한 풍속화를 화가에게 주문해 집안을 장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그의 특별한 재능을 완벽하게 느낄 수 있는 빛과 질감의 섬세한 표현으로 인기가 있었지만 다작을 하지 않아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여전히 교회와 국가가 그림의 소비층이던 주변 유럽 국가와는 달리, 특별한 형식으로 그려져 일반 서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이 시기의 그림들을 *네덜란드 풍속화 라고 합니다.

'네덜란드 풍속화'는 회화의 한 분야이면서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검소하면서도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는 하녀의 모습이 네덜란드 국민성과 일치한다는 것도 우유를 따르는 하녀가 사랑받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네덜란드 풍속화

종교적 혼란이 지나간 17세기 유럽사회는 구교의 가톨릭 세계와 신교의 프로테스탄트 사회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두 세력은 적대적이었지만, 절대적인 대립관계는 아녔습니다. 지금의 네덜란드에 해당되는 플랑드르 지방은 16세기 이래 구교권인 스페인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는데 캘빈주의로 개종하면서 투쟁을 거쳐 종교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특징을 만들었는데 덕분에 네덜란드는 독자적 미술세계를 구축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근검하고 철저한 청교도적 생활방식은 당시 미술가들에게 큰 위기였으며, 그들은 생계를 위해 대안을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다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네덜란드는 상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이 모인 공화국 사회여서 특정 집단 또는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 주변 유럽 국가와는 달리 소시민에 의한 경제, 정치 구조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규모의 교회나 왕궁을 중심으로 한 장식미술이나 조각 대신 가정집에 걸 만한 다양한 장르의 작은 그림들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초상화도 중산층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프란츠 할츠와 렘브란트는 집단초상화의 영역을 한 단계 올려놓은 대가들입니다. 기품 있게 그린 집단 초상화가 공적인 역할을 하는 한편 가정집을 장식하기 위한 풍속화, 정물화, 풍경화등 소위 장르화들이 발달했습니다.

 

네덜란드에는 이름 없는 수많은 직업화가가 있었고, 그들은 자연에 대한 관찰과 유머로서 그 사회를 풍부하게 그려냈습니다. 규모는 작으나 삶에 밀착된 흥미로운 이젤화들은 17세기 네덜란드 사회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어 그리스 이후 미술이 다수의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였던 유일한 시기로 기록되고 있습니다.